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 한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횃불
26/05/2025 21:25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광주민주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요구한 대규모 시민 저항이었습니다. 대학생들과 광주시민을 포함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으며, 이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계승한 전두환 정권에 맞선 강력한 외침이었습니다.
사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갑작스레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 뿌리는 1970년대 말, 박정희 독재 정권 아래서 억압받던 국민들의 민주주의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사망한 후, 전두환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에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1980년 봄,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이에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국민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 전역을 점령하며 시민들과 충돌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시위대와의 마찰이 심해지자, 계엄군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 밤에는 시민들을 향해 첫 발포가 시작되었습니다. 5월 21일 새벽 1시, 전라남도청 앞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집단 발포가 벌어졌습니다. 5월 22일에는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계엄군을 광주 밖으로 몰아냈고, 계엄군은 시 외곽을 봉쇄해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5월 23일, 계엄군은 ‘소탕작전’을 결정하고 다시금 무력 진압을 시도하였습니다. 마침내 5월 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은 광주 도심에 진입하여 시민군을 진압하였습니다.
10일간 이어진 이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193명이 사망(시민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54명이 실종, 376명이 후유증으로 사망, 그리고 3,139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수치만으로도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시위는 군사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전두환 정권과 언론은 이를 ‘폭동’으로 왜곡하며 시위자들을 탄압하였지만, 바로 이 1980년 5월 18일의 대학생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을 군사독재국가에서 세계적인 민주주의 국가이자 경제강국으로 만든 역사의 주역이었습니다.
1995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전두환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국민 통합의 차원에서 그에게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1997년 5월 18일부터 한국 정부는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으며, 2002년에는 희생자들이 안장된 망월동 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켰습니다. 현재 이 묘역은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름 붙여졌으며, 추모 공간이자 민주주의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공원, 역사박물관, 기념 조형물이 함께 있는 공간으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이 군사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는 데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청년과 학생들의 열정과 책임감이 역사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교훈입니다.
이 감동적인 사건은 여러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총 9편의 영화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두 작품은
화려한 휴가 (Mùa hè rực lửa)」, 2007년
택시운전사 (Tài xế taxi)」, 2017년
입니다. 이 두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며 5·18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그 희생과 투쟁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
작성: KoreaLink 한국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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