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에서의 ‘결단’이 연 30년 한-베 관계의 문을 열다

23/12/2025 10:25

1992년 11월의 어느 가을날, 대한항공 여객기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착륙하자마자 응우옌 푸 빈(Nguyễn Phú Bình) 당시 베트남 대표는 예상치 못한 장면과 마주했다.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를 향해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고, 한국 언론 기자들이 그를 에워쌌다. 당시 서울에서 이 같은 관심은 미국 등 강대국 사절단에게만 주어지던 것이었다.

이는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의 공식 대표가 한국을 방문해 외교기관 개설을 추진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제로(0)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서울 주재 베트남 연락사무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푸 빈 대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공항에서 곧바로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 기자들의 첫 질문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베트남의 입장, 베트남의 도이머이(Đổi Mới·개혁개방) 정책, 그리고 양국 협력의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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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응우옌 푸 빈(1992년 11월)

당시 푸 빈 대사는 어떤 언어로 답변할지 깊이 고민했다. 영어로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베트남어를 사용할 경우 통역이 미묘한 뉘앙스를 온전히 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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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다. 한국어로 직접 답변하기로 한 것이다. 평양 유학 시절 한국어를 배웠지만, 그때로부터 15년 가까이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어가 가장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망설였지만 그냥 해보기로 했습니다. 집중하니 잊고 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푸 빈 대사는 기자들 앞에서 베트남이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며, 적을 줄이고 친구를 늘리는 외교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늘 제가 서울에 온 것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협력을 잘한다면, 그 성과는 과거를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회견은 예상 밖으로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고, 이는 한-베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됐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고 믿었습니다.”

푸 빈 대사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냉전 종식과 외교 환경의 변화

과거 전쟁은 베트남과 한국을 서로 다른 진영에 서게 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30만 명이 넘는 한국군이 미군 동맹군 자격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1973년 미군 철수 이후 한국군도 철수했다.

1990년대 초, 소련 해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며 국제 질서는 급격히 변화했다. 각국은 대립보다 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를 추진하며 소련, 중국,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는 한반도 안정을 위해 기존의 서방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외교 지평을 넓히는 전략적 전환이었다. 한국은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수교했으며 동유럽, 몽골,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도 확대했다.

베트남 역시 전쟁 이후 캄보디아 문제로 인한 국제적 고립과 제재 속에서 새로운 발전 전략이 필요했다.

“계획경제와 관료적 통제는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푸 빈 대사는 국내 개혁과 함께 대외 개방이 필수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은 과거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며 국제사회 모든 국가와 우호 관계를 맺겠다는 분명한 노선을 세웠다.

이러한 국제 환경과 상호 필요성은 한-베 수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양국 모두 일정 수준의 관계를 원했고, 그 결과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교 성사와 본격적인 협력의 시작

당시 한국의 핵심 동맹국인 미국은 초기에는 한-베 관계 격상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2년 11월 말, 푸 빈 대사가 신임장을 제출하자 이이상옥 외무장관은 “미국을 설득했다. 즉시 관계를 격상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같은 해 12월 22일, 양국 외무장관은 공식적으로 수교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한국은 1992년 12월 하노이에, 베트남은 1993년 3월 서울에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푸 빈 대사는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로 임명됐다.

푸 빈 대사는 김포공항 기자회견에서 이미 양국 협력이 가져올 상호 이익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한국은 자본과 기술, 발전 경험을 갖춘 국가였고, 베트남은 대규모 인구, 풍부한 인적 자원과 자원을 보유한 국가였다.

“베트남 인구는 당시 7천만 명 이상으로 한국의 거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시장이자 노동력이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은 농수산물과 열대 자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자원이 부족한 한국에 중요한 보완 요소였다. 베트남의 ASEAN 가입 추진 역시 한국과 동남아를 잇는 가교 역할로 주목받았다.

역사와 사람이 만든 다리

한-베 관계는 정부 차원뿐 아니라 사람과 역사에 의해 이어져 왔다. 12세기 베트남 리(李) 왕조의 왕족 이양곤은 고려로 건너왔고, 그의 후손들은 고려의 고위 관료로 활동했다. 13세기에는 이롱뜨엉이 고려에서 몽골 침입을 막는 데 공을 세워 화산군에 봉해졌다.

이 가문 후손인 이창근은 1994년 베트남을 방문해 조상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이후 양국 관계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그는 2010년 베트남 국적을 취득하고 한-베 관광대사로 활동했다.

또한 베트남을 사랑한 한국인 학자 조재현 교수, 전쟁의 상처를 반성하며 화해를 추구한 김진선 전 장교, 베트남 문헌을 자발적으로 번역해 온 안희완 씨 등 수많은 개인이 관계 회복의 숨은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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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치유하는 협력

한국은 전쟁 피해가 컸던 베트남 중부 지역에 무상 원조를 제공했으며, 대표적인 사례가 3천만 달러 이상이 투입된 꽝남 종합병원이다. 이 병원은 2012년 개원해 중부·중부고원 지역을 대표하는 의료시설로 자리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를 보상하려는 진심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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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 남은 상징들

베트남 꾸이년의 ‘용산 거리’, 서울 용산의 ‘꾸이년 거리’처럼 양국의 관계는 일상 속 공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과거의 대립을 넘어 동반자로 나아가는 두 나라의 선택을 상징한다.

지난 8월 또 럼(To Lam)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국빈 방한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베트남은 한국 외교 정책의 핵심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30년이 넘는 시간을 돌아보며 푸 빈 전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낙관했지만, 관계가 이 정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 탄 땀(Thanh Tâ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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